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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서구 월성동 고인돌과 입석이 있는 선돌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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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돌공원 선돌공원에는 집자리 2기와 입석2기 고인돌이 있습니다.  대구 상인동 98-1 유적은 KCC 스위첸아파트를 신축하는 과정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곳 입니다. 청동기 시대의 집자리 11기 , 석관묘 12기, 집석(돌무지) 2기 등 모두 29기의 유구가 확인 되었 된 곳이랍니다. 또한 무문토기와 붉은간토기, 돌도끼, 돌화살촉 등 187점의 유물이 출퇴 되었습니다. 집자리 는 구덩이를 파서 조성 하였는데, 직사각형 집자리가 다수입니다. 규모는 길이 5~15m, 너비는 3~5m 이고, 유촌 깊이는 02~0.5m 입니다. 바닥에는 습기 방지를 위해서 불을 피워 단단하게 굳힌 것을 확인 했답니다.  대구 월암동 363번지 유적 청동기시대 집자리1호 입니다. 2015년 선돌마당공원(길건너 공원)을 조성하다가 발견되었습니다. 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직사각형이고, 크기는 길이 8.6 m 너비 6m 깊이 0.1m 입니다. 바닥에는 크기가 큰 불땐 자리 2기와 작은 불 땐자리 2기가 설치된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덧띠무늬토기, 토기이 입술 부분에 손톱 무늬와 톱니문등이 조합된 토기, 민무늬토기, 무경식석촉, 둥근 형태의 석부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입석 Ⅲ호 는 월암동에서 발견된 5개 중 하나입니다. 원래 월암동 869 - 2번지 일원에 있던 것을 2020년 발굴조사 완료 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졌고, 크기는 215cm 너비 68cm, 두께 42cm 정도입니다. 재질은 화강암 이랍니다. 상인동 152-1 고인돌 은 신일해피트리아파트 신축공사 과정에서 발굴조사가 된 고인돌로,지석묘 상석 1기, 석곽묘 5기, 집석 3기가 발견되었고, 현재의 자리로 이전 복원 되었습니다.  진천동 740-2 고인돌은 2006년 진천동 태왕아너스아파트 신축공사 중에 발견된 고인돌 입니다. 집자리 6기, 지석묘 1기, 구상유구4기, 고상건물지 5동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현재 자리로 이전 복원되었으며, 상인동 고인돌과 함께 있습니다.  월암동에서 발견된 입석 5개중 하나입니다. 입석 Ⅱ호 는

대구 달서구 월성동 청동기유적 장례에 해당되는 한샘청동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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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샘청동공원 대구 월성동1257-12번지 유적 입니다. 2015년 9월 2일 ~ 9월 9일까지 세종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하였으며, 청동기시대 고인돌(지석묘) 1기와 돌덧널무덤(석곽묘) 1기 등 2기가 확인되었습니다.  고인돌 웟돌이 평면형태는 장방형에 가깝답니다. 길이는 214cm / 너비는 186cm / 높이 84cm / 무게는 약 9톤 입니다. 웟돌 아래에서 매장주체부가 확인되었고, 길이는 198cm / 너비50cm / 잔존깊이 42cm 랍니다. 벽석은 16 - 47cm 크기의 깬돌을 이용하여 쌓았고, 벽석과 묘광 사이에는 자갈이랑 흙을 채워넣었습니다. 시상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돌덧널무덤의 길이는 238cm / 너비는 50cm / 평면형태는 세장방형이랍니다. 벽석은 깬돌을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방법으로 4단정도로 축조하였습니다. 시상은 편평한 깬돌을 바닥에 깔아 설치하였습니다. 편평한 깬돌을 바닥에 깔아 설치하였고, 유물은 북쪽에 치우쳐 시상에서 태릉옥 29점이 흩어진 채 출토되었습니다.  *시상 : 주검받음 *깬돌 :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작은 돌 돌(덧)널 무덤 지하에 무덤구덩을 파고 판돌/갠돌/강돌 등으로 장방향의매장주체부를 만들고 그 위에 1매 이상의 뚜껑을 덮는 방식입니다. 그 상태에서 네 벽과 바닥, 뚜껑돌을 각각 1~2매의 판돌을 사용해서 상차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돌상자무덤  이라고도 합니다. 시베리아, 중국 동북지방, 한반도, 일본 등 폭 넓은 지역엥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사용된 돌에 의해서 판돌,판돌형의 깬돌인경우 / 괴석,강돌인 경우로 분류 합니다. 청동기 시대의 무덤의 종류로 돌(넛)널무덤, 고인돌, 돌뚜껑움무덤, 독널무덤이 있습니다.  대구 대천동 511-2번지(월배 이안APT) 유적 무덤의 형식 →  Ⅰ형은 천석만을 이용하여 평적한 것으로 석곽형 석관묘 Ⅱ 형은Ⅰ와 Ⅲ형의 혼용하여 축조한것으로 혼축형 석관묘 (천석, 판석을 혼용)   Ⅲ형은 판석을 이용해 4벽을 축조한 것으로 상형 석관묘 Ⅳ형 벽면돌을 돌을 이용하지

대구 달서구 청동기 상인동 월성동 송현동 대천동 뗀석기 간석기 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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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서구의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유적 : 상인동 171-1번지 유적 / 월성동 1363번지 유적 / 월성동 127번지 유적 / 송현동 906-11번지 유적  상인동 채정마을이 선정(시작), 상인동과 진천동이 선앙(가운데), 유천동, 월성동, 대천동, 월암동이 선단(끝)부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곳에는 농사짓기에 매우 유리하는 곳이라고 해요. 진천천에 의해 형성된 부채꼴 모양의 퇴적 지형이 잘 형성되어 있답니다.  위치는 월성동 777- 2번지 유적(월성 월드메르디앙 아파트) 에서 구석기 시대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전체 유적은 총 13,184점 석기가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흑요석 이 발견되기도 했답니다.   뗀석기 는 어떤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걸까? 뗀석기는 약 70만년 전 인류가 주변에 흩어져 있는 돌멩이를 주워서 사용했으며 그 쓰임에 맞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뗀석기라고 했고 그 시대를 구석기시대 라고 합니다. 뗀석기는 처음에는 망치로 직접 내리치는 직접타격법 으로 석기를 사용하다가 점점 떼기를 사용하는 간접타격볍 을 사용하고, 누르는 힘을 이용해서 가공한 눌러떼기 수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주먹도끼 - 사냥을 하거나 짐승의 털과 가죽을 벗겨 내는데 사용 합니다.  슴베찌르개 - 사냥할때 창이나 화살에 꽃아서 사용합니다.  긁개 - 나무나 가죽을 손질할때 주로 사용합니다.  밀개 - 나무나 가죽 동물의 뼈를 꺽는데 사용합니다.   찍개 - 나무를 자르거나 짐승을 잡을때 사용합니다.  간석기 돌을 갈고 그 전보다 더 날까롭고 단단한 날을 얻을 수 있는데, 석기를 만드는 일도 훨씬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되면서 점차 간석기가 만들어 졌답니다. 그리고 쓰임새에 따라서 농경용 과 공구용 사냥용 그리고 고기잡이용으로 구분된다고 합니다.  농경용으로 돌괭이, 돌보습, 곰배괭이, 갈판과 갈돌, 돌낫, 반달 돌칼  공구로는 송곳, 숫돌, 돌도끼, 돌톱, 돌칼  사냥도구 - 돌화살촉 고기잡이도구 - 그물추, 낚시바늘  움집 : 원형 / 방형 / 장방형 있으며

미나리의 효능과 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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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리 삼겹살을 먹는 시기인것 같아요.  미나리는 아시아 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의 일종이라고 해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고수, 그리고 커민, 펜넬, 아나스 등과 유사한 종이라고 볼 수 있죠. 미나리는 한약명으로 수근 또는 수영이라고 불러요. 달면서도 맵고 서늘한 성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나리의 효능 해독작용과 종금속 배출 이 있습니다. 복어탕에 미나리를 넣는것도 이것때문이죠. 복어의 독을 중화시키기 위한 우리 음식문화의 지혜이기도 하죠.  고혈압에 효과 가 있어요. 전체적으로 혈관계를 정화시켜주는 기능이 강해서 혈압과 혈중 콜레스트레롤 수치 경감효과가 있는데 심혈관 질환에 효적이고, 정신도 맑아지는 효과가 있답니다. 변비의효과 는 섬유질이 풍하기 때문입니다. 식물성 섬유가 창자의 내벽을 자극하여 장의 운동을 촉진 시켜줍니다. 변비에 효험이 있고, 칼로리가 거의 없고,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좋지요.  간기능향상과 숙취해소 입니다. 피로회복에 좋고, 술을 많이 마신경우에 꾸준히 먹어주게되면 숙취해소 및 효과를 볼 수 있답니다. 또한 신장과 방광염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며, 미나리는 황달에도 좋은 효과를 준답니다.  뼈건강 증진 , 나이가 들면 결국 뼈의 밀도가 떨어지겠죠. 이것을 방지하지 위해서 칼슘 섭취가 무척 중요하겠죠.미나리에는 충분한 양의 캴슘이 들어 있습니다. 꾸준히 먹게되면 뼈 건강과 골밀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노화에 따른 골다공증 같은 질병을 예방을 합니다.  시력보호 , 베타카로틴이 들어 있어서 체내에서 비타민A로 전환되고, 비타민 A도 풍부합니다. 자외선 및 각종 자극으로부터 시력을 보호하고 눈의 피로를 회복되고, 야맹증이나 안구건조증 같은 각종 눈 질병에 예방해주는 효과입니다.  항산화작용 , 노화를 유발하는 요소로는 활성산소가 있는데, 활성산소가 체내에서 산화 스트레스를 일으키면 노화가 더욱 빨리집니다. 미나리에는 항산화 물질인 캠프페롤, 퀘르세틴이 풍하답니다. 그래서 노화를 유발하는 활성산서 제거에

불교 사리갖춤 (송림사오층전탑, 길항사 동서삼층석탑,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그당암 서삼층석탑, 봉서리 삼층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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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갖춤 의식에 맞추어 사리를 봉안하는데 필요한 기구를 빠짐없이 갖추어 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리 라는 것은 시신을 화장하여 나온 유골을 말하며, 사리구 는 사리를 담는 그릇과 그릇 속에 넣은 불상 그외 에 장신구, 경전과 구슬, 작은탑을 말합니다. 사리의 경우에는 유리나 수정용기에 담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재질에 용기에 넣은 후에 탑 안에 안치 한다고 합니다.  대구국립박물관의 대표적인 전시품은 총 5가지 라고 합니다.  칠곡 송림사 오층 전탑(보물 제189호) 사리갖춤 : 칠곡군 동명면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라시대 송림사의 오층전탑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현재 보물 제32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수리하던 중에 발견했으며, 뚜껑을 갖춘 거북 모양의 석함 안에 황금 사리기와 구슬 281개, 은환 15개, 향목 7편, 열매 1개가 들어 있습니다. 7세기 한국의 정교한 황금 세공 기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녹색유리잔은 높이 7cm, 입지름 8.7cm 녹색유리 / 사리병 높이 6.3cm , 입지름 3.1cm , 금동 전각형 / 사리기 높이 14.2cm / 금은제 수형 장식구 높이 7.8cm, 입지름 18cm / 금동 원륜 지름 3cm , 두께 7.5cm     출처 국립대구박물관 중세문화실    길항사 동서삼층석탑 사리갖춤 : 길항사 동서삼층석탑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있으며, 그 안에서 나온 사리갖춤은 758년(경덕왕 17)에 언적법사와 조문 황태후, 누이는 길항사에 두 개의 탑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동탑과 서탑에 각가가 봉안 했습니다. 1916년 2월 12일에 도굴범들에 의하여 탑의 일부가 무너졌고, 그 해에 6월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옯기는중에 사리갖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국립대구박물관 중세문화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사리갖춤 : 신라 44대 민애왕을 추모하여 건립한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봉안되었는데, 1966년 도난 당했다가 금동제사방불판은 압수되어 국립주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고, 납석제사리호(높이 8.5cm)는 동국

안장장식(안교장식) 금동관, 굽다리 접시, 고리자루큰칼, 장식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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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국립대구박물관 삼국시대 안장장식(안교장식) 안장을 꾸밀 목적으로 안장에 달아 놓은 금속으된 부품을 말합니다. 좌목과 안장가리개는 대부분은 나무로 만들었기에 삭아서 없어진다고해요. 그래서 출토되는 경우에는 금속으로 만든 안장꾸미개만 나옵니다.  황남대총을 발굴할 당시에 말안장과 홤금으로 도금한 동판에 비단벌레가 날개로 장식한 황남대총 비단벌레 금동 벌걸이가 나왔다고 합니다. 현재는 경주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지만, 보존문제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공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비단벌레 날개 2천여장을 사용했다고 하네요.   국립중앙박물관에 목제 말안장 꾸미개 조각이 있습니다. 출토지는 경주이며, 나무로 만들었기에 삭아서 그 형태만 남아 있고, 현재길이는 대략 3.9cm / 현재너비 10.5cm / 현재길이 1.1cm, 현재너비 2.4cm 입니다.  출처 국립대구박물관 삼국시대 장식대도 신라의 무구에는 환두대도, 장식대도, 철모, 철촉, 부 등이 있습니다. 신라는 황금문화의 전성기에는 신라의 지배층들은 금관, 허리띠, 목걸이, 팔찌와 장식대도에 까지 금을 사용했습니다.황금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들의 신분을 과시하고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 입니다. 삼국시대 무덤의 대표적 껴묻거리(죽은 자를 매장할 때 함께 묻는 물건) 로는 고리자루큰칼 이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무기로 고리자루큰칼 있는데, 손잡이 끝에 둥근고리를 만들어 붙였으며, 금동, 은 드으이 귀금속으로 이용하여 화려하게 만든 것을 장식대도 라고 합니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발견되었는데, 세고리자루 큰칼은 신라 고리자루큰칼의 절정의 모습을 보인다고 해요. 이와 같이 칼을 지닌 사람의 귄위와 구사지휘권을 드러내는걸 생각됩니다. 장식대도를 연구해서 나온 책도 있습니다. <삼국시대 장식대도 문화 연구 저자 이한상> 출처 국립대구박물관 삼국시대 금동관 금관이라는 것은 황금으로 만든 관모를 말하며, 편의상 금동관, 은관 등 다른 금속으로 만든 유사한 형식의 관도 같이 금관이라 통칭합니다. 금동관은 구리

국립대구박물관 고대문화실 쇠뿔손잡이항아리 호랑이모양허리띠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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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국립대구박물관 고대문화실 쇠뿔손잡이항아리 보시는바와 같이 쇠뿔처럼 생긴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우각형 파수부호) 입니다. 무문토기의 마지막 단계에 속하는 토기 입니다. 청동기와 철기시대에 사용된 흑색토기긴목항아리에 쇠뿔손잡이토기가 결합 되면서 출현한 항아리 입니다. 토기의 색깔은 검고 표면이 마연되어 있습니다. 앞 단계인 흑색토기긴목항아리의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삼국시대 전기에 토기의 질이 와질로 바뀌고 토기의 밑바닥이 둥글게 바뀌었습니다. 기본적인 기형은 유지하고 세부적으로는 그릇 표면에 두드린 무늬가 새겨진 굽다리가 붙는 등 변천된 모습을 보입니다.  청도 신당리 유적 발굴 조사에서 이서국(원삼국시대)이라는 소국의 와질 토기로 알려져 있는 조합식 우각형 파수부호(쇠뿔 손잡이 항아리), 주머니호(주머니 항아리), 타날문 단경호(두드린 무늬 항아리)가 출토되었습니다.  울산에서 온양 대안리에서 널무덤에서 삼한시대 토기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쇠뿔모양의 점토 덩어리를 ㅅ 자상으로 붙여서 만든 파수 손잡이를 몸통(동체) 양쪽에 각각 1개씩 총 2개를 대칭으로 붙인 항아리를 말한다. 구형에 가까운 모양의 동체에 크게 벌어지는 아가리가 붙어 있고 몸통 겉면에 바둑판 타날문이 새겨진 것이 특징입니다. 모양과 겉면에 남아 있는 문양을 통해서 2세기 중반에 만든것으로 추정됩니다.  출처 국립대구박물관 고대문화실 호랑이허리띠고리 도식화된 말과 호랑이 모양의 청동 허리띠가 있습니다.  모양은 피바,갈고리모양, 말, 호랑이 등의 다양 합니다 허리띠고리는 가죽이나 천으로 된 허리띠의 양 끝을 걸어 고정시키는 금속구로 허리띠의 한 끝을 고정하는 돌기와 허리에 둘러진 띠의 다른 끝을 거는 고리가 기본 구성요소입니다. 철기 시대부터 백제에 걸쳐 사용되며, 중국식과 북방식이 있습니다. 말과 호랑이 모양은 청동허리띠의 경우에는 경기 와 충청도 등 마한이 있던 영역에서 발견되었고, 초기 백제유적에서 일부 출토되었습니다.  영천시 금호읍 어은동에서 출토된 호형과 마형의 띠고리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전시품 민무늬토기, 요령식동검과 한국식동검 , 대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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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무늬토기(무문토기 : 무늬가 없는 토기) 출처 국립대구박물관 청동기시대의 특징적인 토기 입니다. 민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에 있던 빗살무늬토기에 비해 대체로 태토가 정선되지 못하고 기벽이 두터우며, 노천에서 낮은 온도로 구워졌기 때문에 흔히 적갈색을 하고 있습니다 .민무늬는 납작바닥을 하고 있고, 그릇에 목이 달린 토기가 많은편입니다. 문양이 없고, 적고, 장석, 석영, 운모 등의 비짐을 섞어 800도이하의 온도에서 소성한 청동기시 시대의 토기 입니다.  지역별로 형태상의 특색이 있습니다. 네이버지식백과에 의하면 압록강 하류 유역의 미송리토기 / 압록강 중상류 유역의 공귀리 토기 / 두만강 유역의 공렬토기/ , 청천강 이남의 평안도 및 황해도 지역의 팽이식토기 / 한강(금강) 유역의 가락식 토기 / 충남 일원의 송곡리식 토기 로 구분되고 있다고해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북부 압록강 하루지역의 미송리형토기 / 압록강 중상류의 공귀리형토기 / 두만강 유역의 덧띠새김무늬토기 , 청천강 유역의 겹아가리토기 / 대동강 유역의 팽이토기 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민무늬토기의 기종으로 깊은바리(바리용) / 얕은바리(식기용) / 독 / 항아리(저장용) / 굽달린바리 / 굽잔 / 뚜껑 등으로 구분된다고 합니다. 먼저 바리 는 최대경이 구연에 있으며 동체부에서 꺽임이 없이 곧장 구연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큰쪽을 깊은 바리 기고가 낮은 것을 얕은바리라 합니다. 독 의 경우에는 최대경이 동체부 중위에 있으면서 목이 없다고 합니다. 굽달린바 는 바리에 속이 빈 대각이 부착한 것, 굽잔 은 매우 얕은바리에 원통형이거나 나팔상의 높은 대각이 부착했습니다. 뚜껑 은 낮은 삿갓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제작방법으로 " 민무늬토기는 빗살무늬토기와 마찬가지로 성형(成形)-정면(精面)-소성(燒成)의 과정을 거쳐 제작된다. 토기 형태를 만드는 방법으로는 고리 모양 점토띠를 쌓는 테쌓기[윤적법(輪積法)], 긴 점토띠를 둥글게 쌓아가는 서리기[권상법(捲上法)],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전시품 주먹도끼 와 빗살무늬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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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대구박물관에는 주먹도끼와 빗살무늬토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출처 대구박물관 대표 전시품 주먹도끼와 빗살무늬토끼 주먹도끼    주먹에 쥐고 사용하는 도끼 형태이며 구석기 시대의 많은 석기들 중 하나 입니다.  자갈돌 이나 납작한 모난돌, 드물게는 대형 격지를 밑감으로 하여 양 면에서 격지를 떼어만든 큰석기라고 합니다. 주먹도끼류 Large cutting tools 라는 범주안에 양면이 가공된 주먹도끼 / 한 면만 가동된 주먹찌르개 / 가로날도끼 / 주먹깔 등 자르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학계에서는 대개 주먹도끼를 전기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주먹도끼가 전기 구석기시대뿐만 아니라, 중기 구석기시대에도 꾸준히 사용되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주먹도끼가 발견된다는 점을 이유로 해당 유적이 전기 구석기시대에 속한다고 단정짓는 일은 삼가야 한다.  한편 주먹도끼가 양면이 가공된 석기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양면에서 격지를 떼서 만든 모든 석기를 주먹도끼라는 범주 속에 넣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도 지역에 따라 중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유적인 데도 불구하고, 양면이 가공된 큰 긁개 또는 삼각형의 작은 주먹도끼가 출토되는 일이 가끔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주먹찌르개처럼 한 면만 가공된 석기도 주먹도끼 범주 안에 포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비슷한 형태의 석기라 하더라도 지역적 특성과 문화적 맥락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주먹도끼의 존재 여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먹도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유럽과 아프리카는 구석시대의 표본유물이만/ 동아시아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  유렵과 아프리카는 석기 전면을 떼어 주먹도끼를 사용 / 동아시아는 뽀족한 끝부분고 양 옆의 가장자리에만 날이있다. 그외면은 그대로 놔둔상태입니다. → 유럽과 아프리카는 부드러

국립대구박물관 기획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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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판이라는 것은 건물의 지위, 용동에 따라 크기, 색상, 제작기법, 형태 등에 따라서 차이가 있답니다. 조선왕실은 의외로 사치스럽지 않게 궁궐을 장식했고, 현판도 간결하게 표현하여 백성들이 우러러 볼 수 있으면서도 위엄이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테두리는 칠보무늬, 꽃무늬, 글자무늬, 봉황무늬로 되어있고, 글씨를 새긴 현판에는봉황무늬로 장식해서 격을 높였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영훈당 현판 / 경운궁 현판 / 곤녕합 협판 이 있다고 합니다.  현판에 새겨진 궁궐이야기  영훈당 은 오래도록 향기난다는 뜻입니다. 왕을 위한 물건을 모아 놓는 곳이자 외국 사신들이 만나 회의를 하는 자소이기도 합니다.  경운궁 의 현판은 구름모양을 하고 있고, 봉과 테두리의 칠보 무늬는 좋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합니다.  곤녕합 은 고종의 부인인 명성왕후의 처소로 사용한 곳 입니다. 의미는 왕비가 편안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기록 고종이 직접 현판이 글시를 썼습니다.  궁중 현판의 글씨는 서사관으로 임명된 주로 썼으나 왕과 왕세자, 왕실가족, 관청소속 관리가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면복각 현판, 복수당 현판, 윤집궐중 현판 이 있답니다. 현판에는 전서, 에서, 해서, 행서, 초서의 다섯 가지 글씨체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면복각 현판은 해서체 라고 합니다.  집의 이름을 달경우에는 끝에 ~당 / ~재 / 헌 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경우에는 집의 의무로 보시면 됩니다. 우연히 우리가 어느집에 들어갔을때 보셨을수도 있습니다. 이제 그냥지나쳐다면 이제는 알고 지나칠 수 있답니다.  제일난실현판 은 흥선대원군이 난초를 기르던 건물에 붙였던 현판입니다. 그가 평소 난초와 그리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왼쪽에는 대나무문양이있고, 대원군의 호인 석파와 대원군장의 인장이 있습니다.  퇴촌현판 은 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현판입니다. 조선시대의 명필로 불리는 한석봉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편하게 나이가 든다는 의미가 있